
[OSEN=강희수 기자] 트렌드는 지극히 상대적이다. 새롭게 등장한 트렌드와 비교되면서 종래의 가치가 퇴조하기도 하고 더러는 미처 몰랐던 가치를 찾아내기도 한다.
기아자동차의 기함 THE K9이 그런 위치에 있다. 2018년 출시 돼 3년차를 달리고 있는 플래그십 세단이 거센 도전자들의 등장을 계기로 자신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맞고 있다. 더 빛나는 가치를 찾거나, 새 트렌드 창조자들에게 자리를 물려주거나의 갈림길에 서 있다.
그런데 최근 K9은 새로운 지속가능성을 찾은 듯하다. 경쟁자와 창과 창의 승부가 아니라 창과 방패의 승부를 택하면서 상대성이 되찾아 준 매력을 집중적으로 내세우고 있다.
K9이 주목한 마케팅 포인트는 ‘여성 CEO’다. 한국 여자 골프계의 대들보 박세리가 그 중심에 서 있다. 박세리가 모델로 등장한 K9 광고는 요즘 꽤나 화제다. 플래그십 세단 영상 광고에서 여성 모델이 기용된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KLPGA 투어에서 뛰고 있는 후배 프로선수들도 “나도 세리 언니처럼 ‘선루프 열어줘’라는 차 타고 싶다”고 말한다.
기아차가 박세리를 통해 말하고 싶은 바가 무엇인지 찾아 볼 필요가 생겼다. 마케팅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건 아니다. 판매자가 방향을 잡기 전에 먼저 시장에서 단초를 보여야 한다. 기아자동차 국내사업본부가 시장에서 모종의 단초를 찾았기 때문에 ‘여성 CEO’를 초점으로 내세웠을 게다. 그 이유를 알아보기 위해 2021년형 THE K9을 다시 만났다.
▲미처 몰랐다, 디자인이 주는 안정감
순서를 다시 따질 필요가 있다. 박세리를 모델로 내세웠기 때문에 여성들이 K9에 관심을 갖게 됐을까? 아닐 가능성이 크다. 이미 시장에서 여성들이 더 많은 호감도를 보였기 때문에 박세리를 내세워 주마가편을 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기아자동차에서 집계한 작년 12월까지의 판매 자료에 따르면 개인 구매비율이 45%인데 그 중 여성 구매비율은 10%에 이른다. 일반적으로 대형 세단은 거의 존재감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여성들이 구매를 꺼리는 세그먼트다. 10%의 구매비율은 왜 박세리가 K9 모델로 기용됐는 지를 알게하는 대목이다.
K9의 디자인을 다시 찬찬히 봤다. 여성들이 선호할만한 요인들이 있다는 얘기 아닐까? 상대적인 개념이긴 하지만 안정감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최근에 나오는 신차들은 디자인이 공격적이다. 라디에이터 그릴은 부담스러울 정도로 크다. 한 눈에 확 들어오기는 하지만, 오래 타도 여전히 매력적일 지는 시간의 검증이 필요하다.
K9의 그릴 디자인은 위압적이지 않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비율로 중심을 잡아 준다. 좌우의 헤드라이트는 깊게 쌍꺼풀 진 눈을 내려 감은 것처럼 고혹적이다. 측면과 후면에는 절제된 수수함이 있다. 자기 주장을 고집하기 보다는 먼저 손을 내밀어 융화를 제안한다. 선이 고우니 어느 공간에 내놓아도 잘 어우러지는, 세련됨이 있다.
▲꾸미고 싶고 초대하고 싶은 새들 브라운
외관 디자인이 안정감을 추구한다면 실내 디자인은 ‘럭셔리’ 쪽에 가 있다. 갈색 톤의 배색은 자동차가 기계로 여겨지지 않는다. 집안 꾸미기를 좋아하는 여성들이라면 안다. 공간이 주는 아늑함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2021년형 K9에 추가된 새들브라운(밝은 갈색톤)은 자꾸 꾸미고 싶고 누군가를 초대하고 싶게 만든다. 박세리가 형상화하고 있는 ‘여성 CEO’는 럭셔리한 포인트를 살짝살짝 자랑하면서 내 집 같은 아늑함이 강조된 프리미엄 세단이다. 대형 세단임에도 불구하고 화이트 계열(스노우화이트펄)이 K9처럼 잘 어울리는 차도 없을 게다. 상대방을 위압하지 않는 외관 디자인이 ‘대형 화이트 세단’을 가능하게 했다.
정숙성은 이성적으로 상대를 설득하는데 중요하다. 창문을 내려 유리단면에 손을 대니 두툼한 격벽이 느껴진다. 정숙성은 K9이 처음 출시되던 때부터 강조된 덕목이다. 음악을 켜면 사운드로 꽉꽉 차고, 라디오 DJ의 목소리는 낭랑하게 실내를 때린다.
▲실무형 CEO, 38라인
2018년 4월 첫 선을 보인 K9은 작년까지 2만 2,508대가 팔렸다. 월평균 1,071대의 견조한 판매세를 유지하고 있다. 주목할 데이터가 하나 있다. K9은 가솔린 3.8, 3.3터보, 5.0엔진으로 트림을 구성하고 있는데 3.8 모델을 선택하는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다는 점이다. 무려 83.4%나 된다.
‘38라인’ 대세 현상은 K9의 소비층 분석으로 해석이 된다. 기아자동차의 판매자료에 따르면 K9을 구입한 구매자들의 평균 연령은 51.2세다. 자영업이나 전문직 종사자가 71%나 된다. 사회, 경제적으로 기반을 갖춘 50대 초반의 왕성한 활동가들이 K9의 주 구매층을 이루고 있는 게 확인된다.
이들은 한때 ‘386세대’로 불리며 독특한 정체성을 형성하던 연령층이다. 1960년대에 태어나 1980년대 대학생활을 하며 민주화 투쟁에 앞장섰으며 사회에 진출해서는 적극적으로 변화의 목소리를 냈던 이들이다. ‘3’이라는 숫자는 어느듯 50대가 됐지만 현실에 안주하기를 싫어하는 성향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그들이 선택하는 K9도 386의 시대정신을 닮았다. 기반을 닦았지만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맹렬히 활동하고자 하는 의지가 그들의 선택에서 읽혀진다. 왠지 쇼퍼드리븐으로 써야 할 것 같은 5.0엔진 보다는 앞장서서 현장을 누비는데 어울릴 것 같은 3.8엔진이 절대적인 선택을 받고 있는 것에서 ‘386’의 라임(rhyme)과 묘하게 연결이 된다.
자연흡기 방식의 3.8리터 V6엔진은 결코 만만한 엔진이 아니다. 최고출력 315마력, 최대토크가 40.5kg.m이나 된다. 스포츠모드를 선택하면 시트의 볼스터가 허리를 쓱 잡아주는 품이 운전자를 제법 긴장시킨다. 하체 세팅이 단단하게 조여져 내달리기를 시작하면 진정이 어려울 지경이다. 서울의 강변도로처럼 교통량이 많은 도로라면 차로 유지 보조 기능을 켜고 느긋하게 달리는 게 정신 건강에 좋다. 어댑티브 크루즈 컨트롤을 적절한 음악과 조화시키면 스트레스 제로 환경도 만들 수 있다.
전장이 5미터가 넘는 대형 세단(5,120mm)인 K9은 쇼퍼드리븐(운전기사를 따로 두고 쓰는 차)으로 써도 무방하지만 유별나게 오너드리븐이 많다. 기아차의 플래그십 세단이지만 K9의 소유자들은 직접 차를 몰고 다니며 운전의 재미도 느끼고자 한다. 모델 박세리가 그 생활을 실천하고 있다. 한국 여자골프를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린 여제의 지위에 올라 있지만 방송 해설가로, 예능 프로그램 출연자로 여전히 왕성하게 현장을 누비고 있다.
▲말귀를 알아듣는 2021년형 K9
2021년형 K9은 지난 4월 출시됐다. 새로운 인테리어 컬러를 도입하고 앰비언트 라이트를 확대하기도 했지만 가장 큰 변화는 역시 음성인식을 통한 차량 제어다. 박세리가 광고에서 보여줬던 “선루프 열어줘” 같은 기능이다.
물론 이 기능은 K9이 처음은 아니다. K9이 출시된 이후 고급차에 적용되기 시작한 기능을 이 참에 K9에도 실었다.
운전자는 조용한 실내에서 자동차와 친근하게 대화를 할 수 있게 됐다. 창문을 열거나 닫게할 수 있고, 시트 통풍이나 뒷유리 열선, 공조장치 등을 목소리로 제어할 수 있게 됐다. “에어컨 켜줘”라고 해도 되지만 “시원하게 해줘”라는 말도 알아듣는다. 선루프 개폐는 물론이고 파워트렁크를 여는 것도 말로 시킬 수 있다.
탁한 외부공기가 실내에 유입되는 것을 막는 기능도 강화됐는데, 창문을 열고 달리다가 터널에 진입하게 되면 알아서 창문을 닫고 공조시스템은 내기순환 모드로 전환한다. 차가 터널을 빠져 나오면 창문은 다시 열린다. 앞좌석 스마트폰 무선충전 시스템에는 고속 충전 기능이 추가됐다.
3년차에 접어든 ‘더 K9’은 박세리를 계기로 생기 넘치는 지속가능성을 찾은 듯하다. 경쟁차들의 도전에 힘대 힘으로 맞서지 않고, 스스로를 돌아봤더니 몰랐던 경쟁력이 보였다. 대형 세단에서 여성을 발견한 K9은 더 섬세해지고 친근해졌다.